함께 듣는 이야기
12월호 테마인 ‘발’의 의미를 짚어봅니다. | 글 봄 편집실 | 감수 가정의학과 윤석준 교수
삶에 대한 기록, 발자취
인생 첫 ‘발’을 떼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책 <걷기예찬>의 한 구절이다. 많은 신생아들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푸른 잉크를 양쪽 발바닥에 묻혀 발도장을 ‘쾅’ 찍으며 신고식을 한다. 아기가 처음으로 혼자 두 발로 서고 첫 발을 뗄 때 인생을 향한 도전은 시작된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내딛자 인류는 우주의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었다. 개인의 삶은 물론 인류의 역사도 담고 있는 발자취, 즉 족적은 삶의 시작이자 끝이다. 시작, 도전, 무한한 가능성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발’을 만나보자.
인체의 축소판, 제2의 심장
발은 때론 우리 몸 가장 아래 있다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기도 하지만 인체의 축소판, 제2의 심장이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신체기관이다. 예부터 인간관계가 넓어서 폭넓게 활동하는 사람을 ‘마당발’이라 불렀다. 또 성한 발이 있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도 할 수 있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음을 뜻하는 ‘발이 자식보다 낫다’, ‘발 큰 놈이 득이다’란 속담에서 발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엿볼 수 있다.
26개의 작은 뼈와 33개의 관절, 214개의 인대와 38개의 근육, 25만개의 땀샘과 신경으로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발은 서 있거나 걸을 때 몸을 지탱해주는 신체기관이다. 발에 있는 많은 뼈들은 체중을 발 전체로 분산시키고 서 있을 때 균형을 유지해 준다. 또한 발바닥에 닿는 지형의 변화에 맞추어 자세를 잡고 충격을 흡수한다. 발에는 내측 세로궁, 외측 세로궁, 전족부 가로궁, 중족부 가로궁 등 4개의 아치가 있다. 이들 아치들은 서 있거나 걸을 때, 달릴 때 충격을 흡수하며 이동시 지렛대 기능이 가능하도록 한다.
발은 심장에서 가정 멀리 떨어진 신체기관이기도 하다. 발은 걷는 동안 심장이 뿜어낸 피를 인체의 가장 밑바닥에서 펌프질해 다시 심장으로 퍼 올리는 펌프 역할을 한다. 발끝으로 서면 다리의 동맥이 열려 심장에서 발로 혈액이 흐르기 쉽고, 뒤꿈치로 바닥을 디디면 정맥이 눌려 혈액이 심장 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원리다. 발의 작은 움직임이 몸 전체의 혈액순환을 좌우한다.

두 발로 걷는 세상
두 발로 땅을 디디며 살아온 인류는 최근 100년 사이 ‘탈것’이라는 도구에 이동을 의존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사무실에 갇혀 지내며 걸을 기회를 박탈당했다. 소중한 것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법. 최근 ‘걷기’가 재조명 되고 있다. 제주 올레길과 섬진강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 전국은 걷기 예찬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걷기는 이제 열풍과 유행을 넘어 하나의 현상으로 정착했다.
걷기는 특별한 장비나 경제적인 투자 없이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유산소 운동이다. 하루에 만 보씩 걸으면 발 건강을 지키고, 비만은 물론 당뇨병이나 고혈압과 같은 만성 질환도 예방할 수 있다. 체중 조절 효과도 뛰어나다.
걷기는 단지 한쪽 발을 다른 쪽 발 앞에 내딛는, 일상적인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걷기는 사색을 통해 정서적, 지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고통의 순간에도 걷고 또 걸은 니체, 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 랭보,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 루소에게 걷기는 철학적 행위이자 정신적 경험으로 작용했다. 자연과 하나 되는 데서 오는 일치감과 충만함을 줄 뿐 아니라, 온몸의 감각을 두루 자극하고 머릿속을 신선하게 일깨워주는 걷기를 계속하다 보면 걷기는 하나의 삶의 자세, 하나의 철학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 마음과 시간만 있으면 쉽게 할 수 있는 걷기. 지금 바로 두 발로 힘차게 땅을 디뎌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