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8

함께 듣는 이야기

8월호 테마인 ‘혈액’의 의미를 짚어봅니다. | 글 편집실 | 감수 진단검사의학과 권계철 교수

결코 멈추지 않는 10만㎞ 장거리 마라토너

혈액과 함께

우리 몸이 자동차라면 혈액은 ‘연료’다. 온몸 구석구석을 돌며 60조개가 넘는 세포에 영양소와 산소를 골고루 나눠주며, 운반하면서 발견한 노폐물은 신장으로 보낸다. 이렇게 혈액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우리 몸을 도는 횟수는 하루에도 십만 번에 달한다. 혈관의 총 길이가 약 10만㎞라고 하니 한 차례에 지구 2바퀴 반을 도는 셈이다. 우리 몸이 살아있는 동안 결코 멈추지 않을 마라토너, 혈액을 만나보자.

세포 깨우는 배달꾼, 혈액

피는 물보다 진하다? 색깔도 그렇지만 피는 물보다 농도가 짙다. 혈액에는 물에는 없는 세포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혈액은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으로 이뤄진 혈구(세포성분)와 수분, 단백 질, 미량의 원소들로 구성된 혈장(액체성분)으로 이뤄진다.
세포성분은 특히나 우리 몸의 생명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중 혈액 고유의 붉은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 적혈구 속 헤모글로빈이다. 산소와 결합한 헤모글로빈을 포함한 적혈구는 밝은 적색으로, 산소를 조직에 전달한 적혈구는 검은 적색으로 보이게 된다. 백혈구는 외부로부터 침입한 세균 및 바이러스 등과 싸우는 일을 한다. 그렇다고 많을수록 좋은 건 아니다.

사진

비정상적인 백혈구가 급증하면 백혈병 등의 혈액질환이 생길 수도 있고, 그 수가 극히 적으면 가벼운 감염 등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이외에 혈소판은 혈액을 응고시키는 일을 한다. 액체성분인 혈장 역시 단백질, 원소, 에너지원 등이 함유돼 양분과 수분을 나르고 근육 수축이나 혈압 유지, 생명유지에 관여한다. 무엇보다 피가 물보다 ‘진한’ 더 중요한 이유는, 이 속담의 의미 그대로 혈육끼리의 관계와 관련이 깊다.
혈액 속에는 양쪽 부모에게서 사이좋게 물려받은 고유의 표식이 있는데, 형제들 사이에는 의학적으로 큰 거부감 없이 혈액의 중요 성분을 나눠가질 수 있을 정도의 공통분모를 가지게 되는데 이를 HLA(Human Leukocyte Antigen : 인체조직적합항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골수이식(조혈모세포이식) 전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조직적합성검사다.
의학의 발달로 혈액불일치 이식도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피를 나눈’ 형제 사이의 끈끈한 관계는 이식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사람 살리는 치료제의 첫 단추

헐리우드 영화 <나는 전설이다>를 보면 주인공이 바이러스 감염자의 혈액을 가지고 치료제를 연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다른 한국영화 <감기>에서는 완치된 아이의 혈액을 차지하기 위해 난투극이 벌어진다. 혈액으로 치료제를 만드는 일. 이것이 실제로 가능할까?
실제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가 완치된 사람의 혈액은 백신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원료 중 하나다. 지난 1995년 콩고에서 에볼라로 200여 명이 사망했을 당시 생존자의 혈장을 주입한 8명 중 7명이 살아났고, 지난해 미국에서는 에볼라 환자에게 생존자의 혈청(혈장에서 섬유소를 뺀 나머지)을 투여한 기록이 있다. 심지어 당시 에볼라 주요발병국에서는 생존자들의 혈액을 판매하는 암시장까지 생기기도 했다.
원리는 간단하다. 우리 몸은 바이러스 등에 감염되면 그와 맞서 싸우는 ‘항체’를 만들어내는데, 이 성분을 가진 혈장을 추출해 다른 환자에게 주입하면 동일한 바이러스를 공격할 힘이 생기는 것. 사람의 혈액을 원료로 만든 의약품을 ‘혈액제제’라고 하며, 최근엔 자가혈액으로 만든 면역세포치료제가 간암 재발률을 40%, 사망률을 80% 낮출 수 있다는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처럼 혈액은 아직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은 신종 감염병을 고치기 위한 첫 번째 열쇠인 셈이다. 사진

사진

영화 <감기>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