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4

기록

역대 병원장과 함께 충남대학교병원 43년의 역사를 돌아봅니다. | 박지선 | 사진 정인수

예산 증액과 재활의학과 개설,
두 개의 싹을 틔우다

윤승호 전(前) 충남대학교병원장(82)을 만나기 위해 대전 유성에 위치한 한 재활·통증 전문병원을 찾았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친구를 만나는 날이 꼭 이럴까. 진료실에서 취재진을 맞이한 윤승호 원장은 이날 동행한 충남대학교병원 직원들 한 명 한 명의 손을 꼭 잡으며 설레고 아련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그는 재활의학과장 시절 학과를 함께 이끌었던 현재 김봉옥 원장의 안부를 물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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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호 제 9, 10대 원장

좀 더 나은 의료환경 갖추고 ‘새출발’

“재작년에 재활센터(관절염센터) 건물도 새로 지었지? 병원 규모가 그렇게 커졌어. 정년퇴임 전까지 숙원이었는데 말야.” 윤승호 원장은 1987년 현재 병원보 <행복지기>의 모태가 되어준 ‘충남대학교병원 소식’을 창간했던 기억도 잠시 떠올렸다. “당시에는 인쇄물을 한 장씩 전부 손으로 엮어서 책을 만들었다”면서, “지금은 병원보 참 잘 만든다”는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20여년의 세월 차에 느끼는 격세지감이야 당연하지만, 사실 윤승호 원장은 운이 참 좋은 사람이다. 윤승호 원장이 1985년 4월 1일자로 제 9대 원장 발령을 받았던 그해는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현 충남대학교병원)이 지금의 대사동으로 신축 건물을 지어 이전한지 딱 반년이 지난 후였다. 말하자면 노후화 된 시설과 협소한 부지에서 벗어나, 좀 더 많은 시민에게 더 나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기본’을 갖춘 시점이었다. “1980년대에 중반까지 우리나라 인구가 급속도로 늘었잖아. 그만큼 의료수혜 인구도 증가했고. 이전 대흥동 부지 시설로는 환자 수용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지.”

신축 개원할 당시 병원은 현재의 본관동과 본관의 전력 등을 공급하는 파워플랜트, 영안실, 수위실 총 4개동으로 건설됐다. 총 499병상 30개과로 운영을 시작했는데, 최대 260병상이었던 이전 대흥동 부지보다 거의 두 배가 성장한 규모다. 그럼에도 “환자들이 응급실로 몰려들어 일부는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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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장 재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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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장 발령 통지서

예산 보충 위해 한 목소리를 내다

이같이 병원이 가파른 성장기에 진입한 시기에 원장직을 연임하면서 윤승호 원장이 가장 애를썼던 부분은 병원 예산의 증액이었다. “6개월이면 약 예산이 떨어지는 거야. 그만큼 환자도 늘었지만 우리나라가 잘살던 때는 아니었잖아. 공공의료 분야에 예산이 많지 않았지. 그럼 어쩔 수없이 차용을 해서 약을 사고 다음해에 이자를 내서 갚고… 결국 이중삼중으로 힘들었어.”
이는 단지 충남대학교병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 있었던 국립대학교병원장회의에서도 예산 부족은 늘 뜨거운 감자였다. 그러던 차에 이뤄진 문교부 장관 초청 국립대학교병원장회의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고. 이 자리에서 6명의 병원장은 한 목소리를 냈고 점차적으로 예산 조정이 진행됐다. 이때의 노력은 1995년 충남대학교병원이 법인화 된 이후, 올해 법인화 20주년을 맞는 결실을 맺었다.

재활의학과의 싹을 틔우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재활의학과는 윤승호 원장을 초대 과장으로 1985년 한강 이남에서는 처음으로 개설, 처음 싹을 틔웠다. 이듬해 외래, 근전도실, 전기·운동·수치료실 등을 갖추고 1988년에는 김봉옥 교수가 전임강사로 발령받아 진료와 교육, 연구가 더욱 활발해졌다. 개설 4년 후에는 임상교수연구동 1층으로 이전하면서 28병상으로 규모를 늘려 지방대학 중 가장 먼저 재활의학과의 틀을 구축했다. 연간 외국을 나가는 한국인 백만 명도 안 됐던 1970년대, 재활의학 도입을 위해 영국과 레바논에서 연수를 받고 온 윤승호 교수가 아니었더라면 병원의 역사는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 것이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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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외과 시절 윤승호 원장
(사진 왼쪽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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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의학과·정형외과교실
윤승호 교수 명예퇴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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