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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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정신을 동경한 나치 장교

사랑은 무엇일까. 세상에는 사랑이라 주장하는 수많은 희비극이 있습니다.
한 남자가 사랑이라 믿으며 말하고 행했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치명적인 상처와 피해가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어쩐지 그 믿음이란 게 자가당착이거나 자기기만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회, 문화, 국가의 문제로 확장될 때에는 한 개인의 힘만으로 거대한 운명의 파도를 뛰어넘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데이트폭력,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광신, 식민지화, 독재정치, 전쟁 등 인류역사에 그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기만과 폭력의 논리로 작동되는 광신적 이데올로기라는 어둠 속에서 초라한 절망에 깔려 목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가난해진 풀뿌리 사랑들…….
그렇게 사랑의 바다는 침묵하는 걸까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이데올로기의 기만성을 고발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문학을 예술로 끌어올린 소설 《바다의 침묵》 끝에서 조용히 돌아서며 폭풍우 몰아치는 파도 속으로 몸을 던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교양있는 작곡가였던 남자, 베르너 폰 에브레나크. 나치 독일의 장교로서 프랑스 점령군이었던 그는 프랑스의 예술과 혼이 담긴 아름다움을 너무나 간절히 사랑했습니다. 프랑스정신이야말로 병든 독일을 포용하고 사랑으로 치료해줄 수 있는 이데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마치 영화 <미녀와 야수>에서 마법의 저주로 거칠고 추악해진 야수가 미녀의 신뢰와 사랑으로 다시금 원래의 고상한 모습과 순수한 영혼을 되찾는 것처럼.
“프랑스가 그들을 치료해줄 겁니다. 프랑스가 그들에게 진정 위대하고 순수한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쳐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점령이냐 사랑이냐

베르너에게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이라는 사건은 약육강식이 아닌 전혀 다른 의미였습니다. 독일과 프랑스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완전한 결혼이라고 믿은 것이지요. 적어도 그는 그랬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향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어느 시골 민가에 유숙하게 되었을 때, 그의 사랑은 여인이라는 구체적인 타자로 옮겨집니다. 시골집 주인의 조카딸이었던 그녀는 프랑스에 대한 베르너의 경외감, 숭배, 사랑이 총 집약된 매우 현실적인 대상이지요.
매일 저녁, 우리의 우아한 베르너는 그 집 거실에서 문학이면 문학, 음악이면 음악을 종횡무진 이야기하며 자신이 얼마나 프랑스를 사랑하는지 화려하게 고백합니다. 하지만 거실에는 언제나 두 프랑스인의 완강한 침묵만이 흐를 뿐입니다. 폭력을 사랑이라 노래하는 침략자의 광기 앞에서 무기력해진 자들의 소리없는 저항뿐.

그것이 사랑이었다면

허상의 바다에서 자기기만으로 떠도는 리플리 증후군을 굳이 들먹이지는 않겠습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친구’라며 떠들어대는 나치 독일의 기만과 광기를 상징했던 베르너. 다행히 그는 프랑스인들에게 ‘정신나간 빌런’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그 자신도 결국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였지요. 베르너가 독일과 프랑스의 케미를 찬양하며 고상하게 굴수록 묘하게도 그 모습이 자꾸 불쌍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곧 나치스의 껍데기에 불과한 자신을 깨닫게 되고, 마치 속죄라도 하듯 지옥을 상징하는 동부전선으로 자원하며 쓸쓸히 돌아섭니다. 그 순간, 조카딸의 “아듀(안녕)”하는 말로 침묵이 깨어지는데요. 뒤늦었지만,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남모르게 쳐있던 끈이 끊어지는 때입니다.

연인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사랑합니다. 또 그 힘으로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한 번쯤 그 사랑이 아집과 아전인수가 지어낸 허상인지, 역지사지와 측은지심이 이룬 바다인지 진솔하게 바라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면, 먼 어느 날엔가 사랑했던 사람이 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진정 위대하고 순수한 인간”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사람으로서 한층 아름답게 성장해 있으려니와 사랑은 그것으로 족한 게 아닐는지요.
어떠한 물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바다 앞에서 당신과 나는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성장시켜줄 겁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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