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역대 병원장과 함께 충남대학교병원 43년의 역사를 돌아봅니다. | 글 박지선 | 사진 정인수
한없는 병원 사랑,
‘소아병원’의 토대를 만들다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개원한 이듬해인 1973년. 정용헌(78) 전(前) 원장(제 11대, 1989. 4. 1~1991. 3. 31)은 30대 청년 교수로 부임해 2003년 2월 정년퇴임을 맞기까지 30년을 꼬박 병원에 몸담았다. 강산이 세 번은 변할 동안 정용헌 원장의 병원 사랑은 유난했다.
“진료가 없는 주말에도 매일 올 정도로” 병원을 너무 좋아했던 재직시절을 회고하는 동안 그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제 11대 정용헌 원장
전 국민 의료보험 시행 첫해, 충남대학교병원
오랜만에 병원을 찾은 정용헌 원장은 소아과 연혁을 직접 정리한 문서와 본인의 이력서 한 장, 촬영 날짜를 꼼꼼히 기록해 둔 여러 장의 필름 사진을 풀어놓는다. ‘우량아 선발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사진 속에서 1970, 80년대 추억을 더듬었고, 시민건강강좌 사진에서는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건강강좌의 흐름을 떠올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정용헌 원장이 취임했던 1989년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시행되던 첫 해였다. 1988년에는 대전이 대전직할시로 승격되면서 현 도시의 골격을 갖췄던 시기이기도 하다. 병원 안팎으로 찾아온 의료환경의 변화에 따라 환자 수요도 급격히 늘었을 터. “이미 병원에서는 그보다 훨씬 앞서서 ‘환자가 많아질 것이다’ 예측했지. 만약 그때도 대흥동(의과대학 부속병원 부지)에 있었다면 대응하지 못했을 거야.”정용헌 원장은 병원 부지 이전에 총력을 쏟았던 윤봉헌 초대 원장의 노고를 곱씹으며, 반면 규모 확대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컸다고 회고했다.
“당시 지방대학에서 단일 건물로 이렇게 큰 병원 건물이 없었지. 하지만 이만큼 시설 투자해서 병실이 남아돌면 ‘과잉투자 아니냐’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거야.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 우려에 불과했어.” 신축병원을 짓게 된 게 ‘다행’이었을 만큼 병실은 물론 응급실, 외래에도 환자수요는 꾸준했다. 오히려 연간 예산 중 약(藥) 예산은 반년 만에 소진될 정도로 병원을 찾는 환자는 늘어 갔다.

병실 회진 모습 1994.5

대한소아과학회장 개회인사 1998
대전·충남권 첫 소아병원 설립을 이루기까지
정용헌 원장은 원장 재임시절 특히나 소아병원의 설립에 힘을 모았다. 이는 이미 1975년 런던대학교 의과대학 소아보건학 연수를 갔을 때부터 꿈꿔오던 일이다. “그때 개발도상국 인재들을 선발해서 10명 정도가 연수를 갔어. 200년 된 소아병원이었는데 그때 처음 ‘우리도 이런 병원을 갖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어. 내가 병원장이 되어 소아병원 설립을 추진할 수 있을 지는 상상도 못하던 때에 말야.”
마침 제 10대 원장인 윤승호 원장이 정부에 ‘모자병원’ 설립을 건의했었고, 정용헌 원장은 이를 유·아동만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소아병원’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의지만으로 설립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 정용헌 원장은 병원의 의료인력을 최대한 활용해 소아외과, 소아흉부외과, 소아안과, 소아정형외과 전문의 등으로 새롭게 의료진을 구성하고, 운영 필수 요건을 갖추었음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정부에서도 이에 긍정적으로 화답, 곧 시설예산 100%를 받아 원장 취임 첫해 12월 소아병원 기공식의 결실을 맺게 된다. 이후 준공(1993. 7)과 개원(1998. 7)까지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대전·충남권 첫 소아병원 설립을 예고한 희소식이었다.

침산동에 위치한 집 전경
정년퇴임 이후 정용헌 원장은 집 뒤로 산을 두고 앞으로는 내가 흐르는 침산동(대전시 중구)의 모처에서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퇴임 후 3년 동안은 작은 의원을 운영하면서 제자와 후배들을 위한 마지막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했다. 정용헌 원장은 “거의 일평생을 3차 병원 환자들을 봐왔는데 1차 병원 환자들을 만나 또 다른 임상경험을 쌓는 게 교육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또 다른 병원사랑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