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의 GALLERY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모란의 시인 김영랑의 시에 나오는 표현이다. 따스하게 돌담을 쓰다듬는 햇살, 골목골목 집들마다 환하게 다정하다. 햇빛은 화사하고, 대지는 부드럽고, 세상은 색채로 빛난다고 시인이 속삭여주는 듯하다. 1874년 파리도 그랬을까. 당시 인상파의 창시자인 모네와 르누아르가 이끄는 일단의 화가들이 파리에서 처음 작품을 발표했는데, 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전통적인 그림에 익숙한 관람객들의 눈에 빛의 충격을 남겼다. ‘빛은 곧 색채’라 말하는 인상파는 자연과 일상에서 순간을 포착하고, 시간과 날씨,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색채에 물든 대담한 붓터치로 19세기 회화혁명의 길을 연 것이다. ‘모네에서 세잔까지 :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걸작展’에서 빛의 화가들이 창조한 작품을 즐길 수 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은…….
전 시 명| 모네에서 세잔까지 :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걸작展
전시기간|2020. 1. 17. ~ 4. 19.
사진제공|컬쳐앤아이리더스
전시장소|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
차일드 하삼의 여름 햇빛(Summer Sunlight, 1892)
인상주의는 자연에서 받은 순간의 인상을 포착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이 색채화되는 찰나의 주관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려 했던 인상파 작품의 매력은 들판, 하늘 또는 바다 풍경에서 밝은 빛이 만드는 다양한 이미지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 같은 경험에 있다.
한여름의 해변에서 찬란하고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바위에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는 이 작품 속 여인은 햇볕을 피하는 양산도 한쪽에 접어놓았다. 푸른 망망대해 외딴 섬에서의 고립감은 무아지경의 고요함으로, 한여름의 해변은 파도소리만이 잔잔한 청량함으로, 여인의 독서삼매경과 멀리 보이는 바다의 어우러짐은 평화로움으로 하삼의 붓터치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 작품을 그린 차일드 하삼(Childe Hassam, 1859~1935)은 원래 뉴욕시를 그린 그림들로 유명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소재는 ‘숄스 섬(Isles of Shoals)’이다. 뉴햄프셔 연안에서 대서양쪽으로 10여 마일 떨어져 있는 이 섬은 유명한 여름휴양지로 야생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예술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하삼 역시도 이 섬에 반하여 30여 년 가까이 매년 여름마다 찾아와 작품에 담았다. 하삼은 일생동안 3,000점 이상의 회화, 수채화, 동판화, 석판화를 창작했으며, 20세기 초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인상주의 미술작가 중 한 사람이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못(Pond with Water Lilies, 1907)
인상파의 시작이자 절정으로 불리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그는 이를 위해 많은 여행을 다녔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가장 매혹적인 소재는 자신의 집 정원에서 발견한다. 그의 위대한 작품 시리즈인 <수련(The Water Lilies)>이 그곳에서 탄생한 것이다. 연못 위의 수련은 모네가 지베르니에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연작 시리즈의 모티브가 되었다. 파리에서 서쪽으로 70㎞ 떨어져 있는 지베르니(Giverny)는 이렇듯 모네의 작품배경이 된 곳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정착하고 싶어 하는 여유롭고 정감어린 마을이다. 모네는 1883년부터 1926년까지 43년 동안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생애를 마쳤는데, 오늘날에는 프랑스 국립기념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모네 최후의 걸작이자 우리나라에서 처음 선보이는 이 작품을 위해 모네는 백내장으로 눈이 점점 멀어져갔음에도 연못의 색채를 관찰하고 화폭에 담았다. 그의 대담한 붓터치로 창조해낸 ‘수련 연못’은 빛이 흐르는 고요한 연못이자 반사된하늘이며, 무한한 공간으로 확장되는 하나의 작은 우주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따뜻하게 빛나는…….
르누아르의 꽃병의 장미(Roses in a Vase, ca.1880)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의 초기 작품들은 <보트 파티에서의 오찬>이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처럼 눈부시게 반짝이는 색채와 빛으로 가득 찬 현실생활의 단면을 그린 전형적인 인상파 그림이었다. 중년 이후에 그는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예전부터 애착을 가졌던 18세기 고전주의적 미술에 다시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윽고 고전주의에 인상주의 기법을 혼합하여 독자적이고 풍부한 색채표현을 되찾아 원색대비에 의한 원숙한 작풍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더욱이 1880년대부터는 꽃, 어린이, 여성상에 강한 의욕을 가지고 빨강이나 주황색과 황색을 초록이나 청색 등의 엷은 색채로 떠올리면서 부드럽고 미묘한 대상의 뉘앙스를 따뜻하고 관능적으로 묘사했다.
고흐가 옅은 색조로 그린 <장미가 든 꽃병(A Vase of Roses)>과는 달리 붉은 색의 화려한 장미를 많이 그렸던 르누아르. 이 정물화에서 그는 대담하고 불규칙한 붓터치를 통해 마치 풍성한 꽃잎들이 꿈틀거리듯 장미에 생기를 불어넣으면서도 그대로의 형태를 잃지 않고 빛이 뿜어내는 아름다운 색감을 표현한다. 따뜻하고 열정적인 색채로 장미의 형태와 사랑의 감정을 동시에 포착하는 르누아르의 꽃처럼 사랑스런 인생이 지금 우리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당신의 모든 순간이 사랑스럽습니다.”